el noveno

사랑 이야기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의 대화 속에 잠깐씩 섞여 나오는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두 분은 어떤 사랑을 하셨을지 듣고 싶어진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할머니께 여쭤보고 싶지만, 할머니께서 그런 이야기를 꺼리신다시기에, 망설이고 있는 중. 하지만,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만 들어도, 두 분의 이야기는 정말 특별할 것 같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두 살 많았다. 두 분을 만나게 한 것은 한국 전쟁. 그 당시 두 분은 중학생이었다. (두 분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을까.) 서울에 살던 할머니는 대구로 피난을 오게 되었고, 전쟁 동안 어느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할아버지의 친척집. 할아버지는 그 당시 대구로 유학을 와서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두 분은 그렇게 만났다.

할머니가 서울로 돌아간 이후에도 두 분은 편지를 계속 주고 받았던 것 같다. 두 살 차이라지만, 할머니는 고등학교 1학년 이후 바로 대학에 진학하셨기에 실상 네 살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진로에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조언에 따라 학비가 들지 않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셨다.

할아버지가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1년쯤 뒤, 두 분은 결혼하셨다. 할머니의 집안에서 반대가 많았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대충 짐작이 간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두 살 많기도 했고. 할머니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던데 반해, 할아버지는 (장교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긴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건어물상의 아들이었으니까.

두 분은 결혼 후 다섯 달 뒤, 아버지를 낳으셨다. 할머니께서 이 이야기를 하기 꺼리시는 까닭도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일이니, 40여년 전이었으면 오죽했을까. 두 분은 그 후 37년을 함께 하셨다. 할아버지의 제사 때마다, 방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시는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두 분은, 어떤 사랑을 하셨을까.

사랑의 기술

우리들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할부로 사는 맛 —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그는(또는 그녀는) 사람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본다. 남자에게는 매력있는 여자 — 여자에게는 매력있는 남자 — 는 탐나는 경품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있고 퍼스낼리티(Personality)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이해한다면, 남과 다르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공포는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자를 위협하는 실제적 위험에 대한 공포로서 합리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어도 서양민주주의에서는,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받는’ 정도 이상으로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의 의견일치는 ‘자신의’ 견해가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곧 핸드백이나 스웨터에 새겨 놓은 머릿글자, 은행 출납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가입하는 것 등은 개인적 차이의 표현이 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경우에 ‘이것은 다르다’는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는 애처로운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 — 바라본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가 노래하듯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은 아니다.

성적 욕망은 융합을 지향하지만 결코 육체적 욕망, 고통스러운 긴장의 해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의 불안에 의해,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에 의해, 허영심에 의해, 상처를 내고 심지어 파괴하려고 하는 소망에 의해 자극된다. 성적 욕망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강렬한 정서에 의해 쉽게 자극되고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Erich Fromm

에리히 프롬(Erich Fromm)사랑의 기술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왠지 모르게, 그에게 화가 났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낼 수는 있어도, 내가 그에게 화를 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딱 오늘 하루만, 슬프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그에게 화가 난 척 했다. 아무도 봐 줄 사람이 없었지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나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그가 ‘인생의 반할을 결정짓는다고 믿어지는 시기’, 그 시기만 이야기한채 대화를 끊었다면, 나는 이렇게 화난 척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말했던, 그 사람이 부러웠다. 그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

버스에서 내렸다. 패스트푸드점. 만나기로 한 장소에, 다른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카라멜 마키아또. 3천원. 지갑 속에는 2천원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천원이 넘는 수수료를 물고, ATM기에서 만원을 뽑았다. 마시고 싶었다.

커피 위의 거품을 바라보다, 한 모금.
문제는 키가 아니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되는 이유. 바로 그것, 키. 그래, 늘 그랬다. 지난 삼 년, 세 명의 그들.
키가 작고 귀여웠던, 첫번째 그는, 나보다 키가 20cm 큰 남자를 선택했다. 나는 그에게서 나를 거절한다는 말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늘 ‘남자는 우선 키가 크고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던 두번째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상형이 뭐냐는 나의 질문에 제일 먼저 ‘키 큰 사람’을 꼽던 그는, 지금 내가 화가 나 있는 그는, 나보다 10cm 큰 그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 사람은 되지만, 나는 안 된다.

이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왔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저 멀리 앉아 있는, 내 또래의 여자들을 자꾸만 쳐다 보았다. 그 여자들의 얼굴 위로, 그의 얼굴이 자꾸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계속 보기 위해, 나는 그 여자들을 자꾸만 쳐다 보았다. 만약 내 키가 컸다면, 그는 나를 거절했을까.

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한 잔만 더 마실까.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카라멜 마키아또. 4천 8백원. 한 끼 식사보다 더 비쌌지만, 그래도 오늘은 왠지 마시고 싶었다. 거품.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1800원이라는 돈이 꽤나 차이가 크구나 생각을 했다. 10cm라는 키도 꽤나 차이가 크겠지. 커피를 마시면 키가 크는데 방해가 된다지만, 오늘 하루 뭐 어때.

언제부터인가, 내가 성적표로 이루어진 덩어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곤 했다. 내가 좋은 성적을 받지 않으면, 내가 수학 1등급을 받지 않으면, 내가 이번 학기에도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적표로 이루어진 덩어리이기에, 그 성적표가 없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내가 계속 해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면, 모두가 나를 외면할 거라는 생각.

더 이상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도,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카라멜 마키아또. 천 2백원. 편의점에서 커피를 집어들었다. 세 명의 그들, 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속이 메스꺼운데도, 나는 억지로 마셨다. 그렇다, 나는 쇼를 하고 있었다. 내가 쇼를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가 큰 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좋은 성적표를 받는 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제 정신이 아닌 생각임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그런 생각에 빠져 들었다. 내가 키가 좀 더 컸다면, 그들은 나를 사랑해줬을까. 사랑. 부모님은 나에게, 내가 아름다운 아내를 얻으려면,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서 (주류 사회의 시각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으려면, 경제적 여유,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돈, 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속물 같지만,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속물. 사실 내가 제 정신이 아닌 척 생각을 하는 건, 내가 싫기 때문이다. 나는 속물이었다. 누군가 내게 이야기했듯, 나는 철저히 주류 사회, 속물인 사회가 좋아할만한 사람들만 사랑했다. 그들의 성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외모를 가장 먼저 보았고, 성격은 그 외모에 맞춰 합리화시켰다. 나의 키, 나의 외모. 내가 그들을 그렇게 본 것처럼, 그들이 나를 이렇게 보는게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싫었다. 그들이 나를 이렇게 보는게 싫은데, 나는 그들을 그렇게 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약간의 과대망상과 우울증. 언젠가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상담가는, 나의 장점 20가지를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적었다.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20가지 이상이라는 것을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에게 장점이 하나도 없어도, 나를 안아줄만한 누군가가 나에겐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을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겐 필요했다. 내가 키가 작아도, 내가 좋은 성적표를 받지 못한다더라도, 나를 사랑해줄 사람. 그의 외모가 어떻던 간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나.

나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를 걱정해주실 분들, 만약 있다면, 그러시지 않으셔도 괜찮다. 나는 카페인에 취해 잠시 과대망상과 우울증에 걸려 있을 뿐이다. 오늘 밤 잠이 든 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돌아와 있을 것이다. 치료받아야 할 병든 제품에서, ‘정상적인’ 제품으로. 그런데,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셨으니, 오늘 밤 잠이 들 수 있을까?

나는 달라지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식의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사랑을 한 적이 없다. 카라멜 마키아또를 사서 마시듯, 나를 팔아 그들을 사고자 한 것일 뿐. 부모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른다. 속물 같겠지만, 세상은 원래 이런 거라고. 지금의 나는 내 외모를 팔아 그들의 사랑을 사야 하고, 미래의 나는 ‘경제적 여유’를 팔아 그들의 사랑을 사야 한다. 그 경제적 여유를 얻기 위해, 나의 성적표는 계속 좋아야 한다. 괴롭다. 속물인 나는 괴로운데, 그렇다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괴로울까? 모르겠다.

세 명의 그들, 세 번의 좌절, 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그리고, 세 번의 사랑을 했다고 믿는 속물 ‘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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