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noveno

하양이 가출기

6월 12일, 금요일 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앞에 고양이 사료와 모래가 놓여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 ‘설마…’라고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고양이 카페를 뒤지는 동생,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던 엄마. 문 앞에서 생각했던 게 맞았다. 하양이가 집을 나갔다.

언제 나갔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12일 아침, 내가 학교에 갈 때 나가버린 것 같았다. 엄마는 내 가방에 우산을 넣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러 갔었다. 그 잠깐, 20초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하양이는 그때 나가버린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집안에서 하양이를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엄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나가버렸다고? 여전히 집 안에 있을 거라고, 어딘가 숨어서 나오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동생이 낮 동안 한 것처럼, 나도 집안 곳곳을 뒤졌다. 보이지 않았다. 정말 나가버린 걸까? 힘이 빠졌다. 문득, 나가고 싶어했다면 보내주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그래도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덮고 옆으로 돌아눕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하양이가 보고 싶었다.

다음날 내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에 전화했다. 제발 돌아왔기를 바라며. 전화를 받은 엄마는, 관리사무소에 가서 CCTV를 확인해보았다고 말했다.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고, 아직 아파트 건물 안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직 집 안에 있는 게 아닐까?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안에 하양이를 찾는다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지하부터 옥상까지, 스물세 층을 네 번이나 찾아보았다고 아빠가 말했다. 역시나 집 안에는 없는 것 같았다. 집 안에는 없고,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는데, 아파트 복도와 계단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없다면, 하양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다른 집에 있을 거라는 결론. 12일에는 아파트 소독이 있었는데, 여러 집의 문이 열리고 닫힐 동안 하양이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낯선 분위기에 놀라 그 집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하나. 아니면, 누군가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던 하양이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을 거라는, 가능성 둘. 가능성은 그 두 가지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하루가 지났다. 엘리베이터 안의 전단이 없어졌다. 다시 붙였다. 다시 붙인 지 두 시간이 채 못되어, 또 다시 없어졌다. 이상했다. 엘리베이터 CCTV를 확인해보았다. 두 번 다 같은 사람이었다. 전단을 읽지도 않고 떼버리는 모습이 수상했다. 저 사람 집에 하양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끝에, 그 사람 집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고양이를 무척 싫어한다는 그 사람에게,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었다. 그 사람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하양이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갔다.

찾을 방법이 더는 없다는 생각에, 동생과 엄마는 너무나 힘들어했다. 보다 못한 아빠가 시장에서 얼룩무늬의 코리안 숏헤어 한 마리를 데려왔다. 처음에는, 그 녀석이 하양이를 쫓아내기라도 한 듯 왠지 미웠다. 하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그 녀석도 참 귀엽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양이와는 달리, 그 녀석은 잠시도 사람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을 보면서, 차츰 마음이 안정되었다.

하양이가 집을 나간 지도 1주일이 지났다. 8일째, 20일 밤, 꿈에 하양이가 나왔다.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옷장 안에 들어가 버리는 하양이. 잠에서 깨고 나서, 옷장을 열어보았지만 하양이는 없었다. 하긴 뭐, 한두 번 열어본 것도 아닌데….

21일, 일요일, 9일째. 학교에 갔다가, 학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빠였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하양이를 봤다고 했다. 그 후에 아빠도 하양이를 보았고, 엄마도 하양이를 보았다고 했다. 하양이가 풀숲에서 도망 다니고 있다고 했다. 아빠는 참치통조림을 가지러 집으로 가다가 나를 만난 것이다. 나도 하양이를 찾으러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심장이 뛰었다. 아파트 뒤 풀숲에서 하양이를 부르는 엄마와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풀숲으로 들어갔다. 엄마와 동생을 찾고 있는데, 하얀 고양이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양이였다.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다. 어둠 속에서 빛나던 하양이는, 이내 곧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아파트 단지 안을 돌아다니다가, 동생과 아빠를 보았다. 하양이가 동생 바로 앞에 있었다. 동생은 참치로 하양이를 유인해 가까이 오게 한 뒤 붙잡았다. 집을 나간 지 230시간 만에 하양이를 찾았다.

그 며칠 동안, 하양이는 몸집이 무척 커졌다. 풀숲을 뛰어다니느라 더러워진 발을 빼면, 온몸이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목에는 목줄을 했던 흔적이 있었다. 역시나 추측대로, 하양이는 누군가의 집에 있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이 하양이를 계속 찾는 것에 부담을 느껴, 몰래 풀어놓은 듯 보인다. 경비 아저씨가 때마침 하양이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하양이를 영영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CCTV를 확인해본다면 누가 하양이를 데리고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하양이를 찾은 다음 날인 오늘,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양이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했던 고민과 비슷한 고민이 다시 머릿속을 맴돈다. 개와 달리, 고양이에겐 ‘주인’이라는 개념이 없다. 하양이를 참치로 유인하여 붙잡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고양이에겐 주인이 없기에 집을 나간 고양이는 주인이 부른다고 해서 달려오지 않는다. 하양이는 아마 하양이를 데리고 있었던 그 집에서도 행복하게 지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보다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며칠 동안 살이 부쩍 찐 것을 볼 때, 그 사람들은 하양이가 늘 먹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준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양이는 나가고 싶어서 나갔고, 새로 들어간 집에서 행복했으며, 우리는 참치로 유인해서야 하양이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슬프고 힘들다고 해서, 하양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도 되는 걸까? 우리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는 걸까? 처음 하양이를 만났을 때처럼, 이번에도 이 고민에 답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휴머니스트(인본주의자)인 것 같다. 하양이가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참치를 먹고 있는 하얀 고양이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얼룩무늬 고양이

하양이와 하인이. 코숏 녀석은 이름을 ‘하인이’로 하기로 했다.

시선 1318

지난 일요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시선’ 시리즈 중 네 번째, <시선 1318>을 봤다. 이전의 시선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옴니버스식 영화이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시선’은 ‘청소년인권’이 주제이다. 솔직히 말해서, 전반적으로 좀 실망스러웠던 영화였다. 이전의 ‘시선’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말이다.

춤을 추고 있는, 교복을 입은 30여명의 여자 중학생들

첫 번째 영화, <진주는 공부중>은 그 중 최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힘들게 만든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중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시험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전교 1등’과 꿈이 있지만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늘 무시당하는 ‘전교 꼴등’이 나온다.
이 영화는 학교 내 경쟁과 같은 여러 문제들을 너무나 단순화시켜 버린다. 전교 1등의 문제는, 시험 한 번 빠지고 (전교 꼴등과 답안지 이름을 바꿔쓰는) 조그마한 일탈을 한 뒤 ‘늘상 전교 1등’이 아닌 ‘가끔은 2, 3등도 하는 1등’이 되는 것으로 쉽사리 해결되어 버린다. 전교 꼴등의 문제도, ‘성적이 오르는’ 것으로 쉽사리 해결되어 버린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그것이 ‘해결’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화 끝 부분에 나래이션을 통해 “학교가 그리 쉽게 변하겠느냐”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영화가 ‘인권 영화’가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흔하디 흔한 ‘청소년 드라마’라고 부를 수는 있을 지언정, 이 영화를 ‘인권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민망하다. 왠만한 ‘청소년 드라마’에서 보여준 문제의식보다 더 떨어지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문제를 ‘심각하게’ ‘무게잡고’ 다루라는 뜻이 아니다. 발랄한 것과 생각이 없는 것은 구분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전교 1등이라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고, 전교 꼴등이라고 해서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다”는 식의 이야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밤 12시까지 학원을 ‘돌리는’ 학부모조차도.

허공을 쳐다보는 여학생과 그 뒤에 손을 주머니에 넣은채 서 있는 남학생. 바닷가에 서 있다.

두 번째 영화, <유 앤 미>는 조금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였다. 내가 영화를 보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주제를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데,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결정’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역도를 해서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지만 그것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여학생과, 적응력 부족으로 호주로 유학을 가야 하지만 내켜하지 않는 남학생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외적 갈등이랄까 하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특정한 ‘인권’을 보여주기에는 유리하지만, 현실의 다양한 측면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청소년의 미래에 대한 어떠한 결정이, “이거 해!” “싫어!”라는 단순한 갈등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보다 많지 않은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나름의 방법으로 뭔가 저항을 해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 보려 하지만, 결국 그냥 무심하게 흘러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갈등을 조금 더 드러낸다 해서 이 영화의 매력 자체가 반감된다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약간만, 아주 약간만 더 드러냈으면 좋았을텐데. 물론 전계수 감독의 말대로, 조절을 잘하지 못할 경우 ‘프로파간다’가 되어버릴 위험은 있지만.

아기 침대 옆에서 아기를 보고 있는 여학생 3명

세 번째 영화, <릴레이>는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였다. 비혼모 청소년 문제를 다루는데, 줄거리는 꽤나 흥미롭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 교과서적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많지만, 과연 그 말들이, 관객들이 모르던 것일까? 다들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말을 전달하는 것에만 주력하는 듯 보인다. “미혼모는 왜 학교를 그만둬야 하죠?”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는 거죠?” 등등. 결국 다들 ‘이해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야기만 실컷 하다가, 뻔한 결말로 끝나버리고 만다. 현실이 그렇게 경쾌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눈을 찡그리며 웃고 있는, 빨간 옷의 청소년 여성. 그 뒤에 교복을 입고 있는 두 명의 여학생이 등을 돌리고 서 있다.

네 번째 영화,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는 다섯 편의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영화였다. 앞의 세 편을 보면서, “설마 윤성호 감독마저 이런 식으로 만들진 않았겠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중산층 청소년이 대부분인 중학교를 나왔다. ‘중산층 청소년’의 실제를 담아내고자 한 이 영화가, 정말 현실 그대로이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테고, 현실의 대부분을 ‘날 것 그대로’ 담아냈다는 느낌. 영화에 나오는 청소년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며, 정말 신경을 많이 써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각본을 청소년들이 직접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나….)
개인적으로, 보면서 김용민 씨가 이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10대, 너희에게도 희망이 없다”고 막말하려나. (웃음) 윤성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청소년들을 이 “영화에서 은근히 야유”했다가 “얼마 뒤 그들이 가장 먼저 촛불을 드는 것을 보고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던데, 촛불 시위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후에 이 영화를 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 ‘야유’가 있다면, 그것은 비단 청소년만이 아니라, “현재를 유예하는, 합리성을 도외시하는, 검증되지 않은 경제의 신화만 좇는모든 이들에 대한 것일게다.
이 영화는 그것을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청소년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대안의 방향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게 만든다. 이 영화의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담이지만, “이명박이 이길 것 같으니 이기는 쪽에 찍으면 기분좋지 않겠냐”며 “이명박을 찍으라”고 엄마에게 말하는 청소년이 극 중에 나오는데,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청소년을, 대선 당시 정말로 봤기 때문에.

정면을 응시하는 짧은 머리의 여학생

다섯 번째 영화, <달리는 차은>도 참 좋았다. 주제 자체는 그리 새로울게 없지만, 그저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마음 속에 깊이 닿았던 영화. 청소년인권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권을 잘 섞어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인권은 다 연결되어 있을 것인데…. 요즘 들어 인권에 관한 생각이 좀 정형화(?) 되었던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반성하게 되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참 잘 찍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티내지 않고도 그렇게 아름답게 찍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텐데. 초반부부터 결말까지 정말 잘 짜여진 영화이면서도,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덧쓰기.
그나저나, 구글에서 시선1318을 검색해봤는데 왜 이리 박보영 씨 이름이 많이 나오는 거야. 어떤 블로그 글은 대놓고 ‘박보영이 나오는 시선1318′ 같은 식으로 제목을 정하질 않나. 박보영 씨 이름을 제목에 집어넣어서 박보영 씨 이름으로 블로그 방문자를 늘려보려하는건 이해하지만, 그런 식으로 박보영 씨 이름을 제목에 집어 넣으면서까지 박보영 씨 덕을 보려 하는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블로그 내용도 박보영 박보영 박보영… 아무리 <과속스캔들>이 아니라 <릴레이>가 박보영 씨가 데뷔한 영화라지만. 나 같으면 그런 식으로 박보영 박보영 하면서 박보영 씨 이름으로 블로그 방문자 수나 늘리려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Rêve: La Nuit à Paris

빠리의 밤. 클리시 광장. 그와 나는 빨간 지붕의 까페 앞을 걷고 있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옷이 조금씩 젖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내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붉은 얼굴로 나는 저기 붉은 까페에 잠시 들어가 비가 그칠 때까지 뭐라도 좀 마시자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북쪽 언덕에서 우산을 파는 한 남자를 보았다고, 그 우산을 사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붉은 까페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는 우산을 사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펴지지 않는 우산을 세차게 흔들었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나는 붉은 까페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애원하듯 까페에 들어가자고 말하는 나를 뒤로하고, 그는 우산을 사러 북쪽 언덕으로 가버렸다. 나는 불안해졌다. 나는 다시 우산을 세차게 흔들었다. 비를 맞으며 계속 흔들리던 우산이, 펴졌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걸어와 우산을 같이 쓸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자신은 우산이 없다면서. 나는 긴 생머리를 한 그 사람에게, 꺼지라고 소리쳤다. 눈물이 났다.

나는 우산을 사러 간 그를 찾으러 북쪽 언덕으로 달려갔다. 비는 그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비가 계속 오기를 원했다. 간절히 원했다. 간, 절, 히, 원, 했, 다. 얼마나 달려갔을까, 그가 우산 파는 남자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펴져 있던 우산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세찬 바람이 불어 우산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우산을 잃어버렸다. 비는 그쳤다. 그는 우산을 사버렸다. 나의 우산이 아닌 우산.

이것은 꿈이다. 거짓말 같이 생생한 꿈. Henry Valentine Miller.

한예종 사태

정말로 끝: 인권의 보편성 논쟁

논쟁을 계속하려 했더니, 논쟁상대자가 덧글을 달아주질 않네요. 그가 제 블로그 주소를 알아내서 들락날락하는 것이 별로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그에게 논쟁을 계속하자고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논쟁을 이쯤에서 마치게 될 것 같네요. 논쟁을 간단하게 정리해두려 합니다. 제가 별로 논리적이지 못한데다가 공부도 부족해 글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많을 것 같은데, 지적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든 이론체계에는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공리’라고 하죠. 공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론의 전개가 불가능합니다. 인권의 공리는 아마,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이 되겠죠.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권이론의 전개가 불가능합니다.

논쟁상대자 (닉네임) Yahweh는 이 점을 공격하죠. 인간이 존엄한 존재가 아니므로 인권이론은 모조리 틀려먹었으며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이유를 듭니다. 첫째로는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와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 둘째로는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사실 둘 다 황당한 지적입니다. 첫 번째 지적에 관해서는 마지막 답변에서 답을 한 바 있죠.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이지만, 단백질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배치’마저 같지는 않다는 것. 그 특별한 ‘배치’가 인간을 만들어내고, 그러므로 ‘존엄하지 않은 단백질 덩어리’와 ‘존엄한 인간’은 구분가능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인권’뿐만 아니라 ‘동물권’, ‘식물권’, ‘존재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발전시키기가 아직까진 쉽지 않네요.

두 번째 지적의 경우, 이 글을 시작하며 이야기한 바 있죠. 애초에 증명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을, 증명불가능하니까 안 된다고 주장을 하니…. 이런 식으로 들이대면 무너지지 않을 이론체계는 없습니다. ‘자본주의’를 예로 들어보죠. 자본주의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이기적 개인’을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 증명합니까? 게다가, 인간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은 동물이라는 것도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는걸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이론 상으로 무너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민족주의’ 또한 마찬가지이겠죠. Yahweh는 덧글 상에서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되돌려주는 것 뿐이죠. 이론체계에 증명불가능한 공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권은 무너뜨릴 수 있을지언정 다른 어떠한 이론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도대체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를 해체해 냈다고 득의양양 깝쳐대는 속칭 ‘좌파 지식인’들”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한심한 주장을 하는 지식인은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그 ‘지식인 리스트’에 누가 있는지 저에게 알려준다고 해도,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저는 그 지식인들의 대변인이 아니고, 좌파도 아닌걸요.

덧붙임.
1. 인권이 보편적이라는 것(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이 앞뒤 생각않고 ‘인권문제’에 달려들어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참을 수 없는 어떤 ‘인권의 보편성’의 가벼움은 북한인권단체들의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죠. 자본주의를 다시 예로 들자면, 인간이 이기적 존재임을 공리로 삼는다고 해서, 어떠한 사회의 여러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를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론은 보편적이지만, 그 이론의 적용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2. 사실 이 논쟁은 몇 달 전에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새로운 고민에서 니체의 말을 바꿔 “무엇이 보편적인가?”가 아닌, “왜 보편성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은, 이미 (오프라인 상에서 Yahweh에게) 제가 적절한 설명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인권은 보편적인가?”를 여전히 계속 고민하고 있었기는 합니다. 인권, 보편성과 끝없는 투쟁에서 이야기한 바처럼, 인권의 보편성(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를 논증할 수 없다면 구체적 권리들을 말하는 것은 결국 ‘생떼’와 구분할 수 없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죠.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공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생떼’가 되어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3. 사실 이런 짓 무의미합니다. =_= 이럴 시간에 인권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 고민하는게 백 번 낫죠. 이런 논쟁이 인권이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이보다 훨씬 생산적인 논쟁이 역사상 많이 있었죠. (궁금하시다면 ‘인권의 문법’이라는 책을 보시길.)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이유로 논쟁에 매달려 여러 바쁜 사람들을 소환(?)한 저를 용서해주시길.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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